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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놀이와 돌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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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싸움 이미지, 다리밟기, 연날리기와 함께 청계천에서 행해지던 민속놀이로 연등놀이와 편싸움이 있었다.
편싸움 이미지

다리밟기, 연날리기와 함께 청계천에서 행해지던 민속놀이로 연등놀이와 편싸움이 있었다.

연등놀이는 부처님 오신날을 봉축하는 행사로 고려의 풍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조선초기에는 정월 대보름날과 4월 초파일 두 차례나 열렸다.

그러나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펴는 조선왕조에서 연등행사를 여는 것은 국가의 기본이념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태종은 1415년(태종 15) 정월대보름날 연등과 초파일 연등을 폐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국가와 정책과는 달리 조선시대에 불교는 신앙으로서 궁중은 물론 일반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불교의 가장 큰 행사인 연등행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비록 정월 대보름날 연등행사는 사라졌지만 4월 초파일 연등행사는 계속 되었다.『열양세시기』에 의하면 인가와 시장가는 물론 관청가까지도 등대〔燈竿〕를 세우고 등을 매달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광통교를 중심으로 개천주변은 연등놀이를 하는 중심지였다.

연등놀이 사진

조선말기 박주대(朴周大,1836∼1912)가 지은「성시전도(城市全圖)」라는 시에는 연등놀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4월이면 개천에서 연등놀이가 펼쳐지는데
제각기 만든 연등은 온갖 재주를 자랑하네
하늘 높이 바지랑대에 연꽃등이 매달리고
바람 타고 꼬리치며 잉어가 올라가네

다리밟기, 연날리기, 편싸움 등 다른 민속놀이들이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것과 달리 연등놀이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해마다 4월 초파일이면 등대 대신 가로수와 전기를 이용하여 연등을 밝히고, 현대식으로 개량된 다양한 연등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편싸움은 한자로는 '돌싸움',‘석전(石戰)’또는‘편전(便戰)’이라고 하였는데, 주로 단오날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돌팔매질을 하여 승부를 겨루던 놀이였다.

역사적으로 고구려에서는 석전이 하나의 국가적 연중행사로서 국왕의 참석 하에 행하여졌으며, 고려 때에는 석투반(石投班), 석투군(石投軍)을 별도로 설치하여 석전을 장려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석전은 단순한 놀이의 차원을 넘어 전쟁에 대비하여 연무(鍊武)의 큰 뜻을 가지는 전투적 놀이, 또는 실전에 대비한 연습 놀이로 행해졌다. 1436년(세종 18) 북쪽 변방의 경우 석전군을 편성하여 야인(野人)을 방어하도록 하였으며, 1508년(중종 3) 삼포왜변 때에는 안동과 김해의 석전선수 수백 명을 모집하여 왜인을 쳐서 격파하고 실전상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청계천 다리 위가 연날리기 장소로 적합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조선후기 홍석모(洪錫謨, 1781∼1850)가 지은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서울에서 석전은 성밖의 만리현(萬里峴, 지금의 중구 만리동)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성안의 아이들도 이를 모방하여 종루 부근과 개천변의 비파정(琵琶亭), 즉 지금의 종로구 관수동 부근에서 편싸움을 하였다고 한다.
편싸움이 편을 갈라 돌을 던지며 싸운다는 점에서 개천은 자연스러운 남북 양편을 갈라놓는 경계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싸움이 심할 때는 소리가 지축을 흔들고 서로 공격하여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지는 등 피를 보고서도 그치지 않았으며, 다치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또 생명에 대한 보상법도 없다. 따라서 관아에서 이런 싸움을 못하도록 금지하였으나 고질이 된 악습이 온전히 고쳐지지 않았다고 한다.
편싸움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하나의 연중행사로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에서 행하여졌으나, 일제강점기에 금지되어 오늘날에는 전승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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